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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봄여행 - 쌍계사 십리벚꽃길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1.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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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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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2261
내용


 

구례 산동 땅의 산수유가 피고 지는 동안, 지리산 토끼봉 아래의 화개천은 천천히 봄꽃 축제의 절정을 준비한다. 화개천을 따라 이어지는 수천 그루의 벚나무가 연분홍빛 꽃망울을 주렁주렁 매달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산동의 산수유가 지고, 한두 차례 봄비로 섬진강의 물이 조금씩 불어날 때쯤 마침내 벚꽃들이 일제히 꽃망울을 떠뜨려 화개천을 온통 연분홍빛으로 물들이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벚꽃 명소로 알려진 곳이 많지만, 그중 단연 으뜸은 이 하동 화개천 벚꽃이다. 화개천의 벚나무는 덩치도 클 뿐 아니라 꽃송이도 탐스럽다. 게다가 이 화개천 벚꽃은 자연의 모습을 거의 온전히 지니고 있다. 화개천 곳곳에 돌 축대가 있긴 하지만, 이런 큰 물길에 석축이 좀 있는 건 이제 어쩔 수 없는 풍경이다.

 

다른 곳의 벚꽃들은 대개 삼 할 이상은 사람의 손길이 닿은 인공적인 느낌이 든다. 인공호수에 조성되었거나 혹은 그 배경에 살풍경한 건물들이 들어서 있거나 아니면 너무 깔끔하게 정비를 해놓아서 정이 좀 덜 간다거나… 이런 저런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이 화개천 벚꽃은 그렇지 않다. 게다가 화개천을 따라 십리를 이어진 벚꽃 길 아닌가. 오래된 벚나무들이 십리를 이어가며 분홍 폭죽을 터뜨리듯 일제히 연분홍 꽃을 피웠으니, 그 화사함은 그저 절경이라는 말밖에 달리 표현을 찾기 힘들다.

화개천 벚꽃은 화개천이 섬진강과 만나는 화개장터에서 시작된다.

 

겨울에도 꽃이 피는 따듯한 곳이라 하여 화개(花開)라는 이름을 얻은 곳, 예전에는 전국의 5대장의 하나로 꼽혔던 왁자했던 곳 그리고 최근에는 전라도와 경상도의 접경이라는 지리적 특성으로 마치 동서 화합의 상징인 양 추어올려지는 곳. 그러나 지금의 화개에서는 그런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화개장터의 명성이 아주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왁자지껄했던 화개장터의 모습은 아직도 김동리의 소설 ‘역마’ 속에서 생생히 살아 있다.


“장날이면 지리산 화전민들의 더덕, 도라지, 두릅, 고사리들이 화갯골에서 내려오고, 전라도 황아 장수들의 실, 바늘, 면경, 가위, 허리끈, 주머니끈, 족집게, 골백분들이 또한 구렛길에서 넘어오고, 하동 길에서는 섬진강 하류의 해물 장수들이 김, 미역, 청각, 명태, 자반 조기, 자반 고등어들이 올라오곤 하여 산협(山峽)치고는 꽤 성한 장이 서는 곳이기도 했으나, 그러나 화개장터의 이름은 장으로 하여서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벚꽃 터널

 

 

장이 서지 않는 날일지라도 인근 고을 사람들에게 그곳이 그렇게 언제나 그리운 것은, 장터 위에서 화갯골로 뻗쳐 앉은 주막마다 유달리 맑고 시원한 막걸리와 펄펄 살아 뛰는 물고기의 회를 먹을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주막 앞에 늘어선 능수버들 가지 사이사이로 사철 흘러나오는 그 한 (恨) 많고 멋들어진 춘향가 판소리 육자배기들이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게다가 가끔 전라도 지방에서 꾸며 나오는 남사당 여사당 협률(協律) 창극 광대들이 마지막 연습 겸 첫 공연으로 여기서 으레 재주와 신명을 떨고서야 경상도로 넘어간다는 한갓 관습과 전례(傳例)가 화개장터의 이름을 더욱 높이고 그립게 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지리산에서 내려온 화전민과 등짐장수인 황아장수그리고 포구로 들어오는 해산물 배와 막걸리, 육자배기에 남사당, 여사당패의 풍물까지… 과연 복작복작했던 화개장터의 모습이 선하게 떠오르는 듯하다.


현재는 화개에 옛 장터의 모습을 재현하기 위해 초가집 몇 채가 들어서 있다. 그러나 지금의 화개가 장이 성할 만한 자리가 아니니, 그 초가집들이 그저 생경한 소품처럼 느껴지기만 한다. 이제 옛 화개는 없다. 시대의 흐름의 떠밀려 장터가 사라지는 것은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어차피 모든 것은 죽거나 없어진다. 그러니 사라지는 것은 곱게 사라지도록 하자. 억지로 옛 문화를 되살린답시고 육자배기 대신 트롯을 틀어 놓고, 남사당 대신 삐에로 분장의 엿장수가 헛춤을 추고, 펄펄 살아 뛰는 물고기 대신 통돼지 바비큐를 굽는 것으로 옛 문화를 되살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 국적불명의 난장을 만들어 놓으면 자칫 화개(花開)라는 고운 이름마저 더렵혀질지 모를 일이다.

 
     
 

화개장터를 지나 쌍계사 쪽으로 걸음을 옮겨 상가 지역을 지나면 바로 벚꽃의 향연이 펼쳐진다. 화개에서 쌍계사까지 십리 길, 벚꽃이 만개할 때면 이 길은 그대로 무릉도원으로 이어지는 길이 된다.

 

뒤로는 지리산 능선이 든든하고 그 가운데로 화개천 물길은 길고 수수하게 이어진다. 지리산과 화개천은 그렇듯 별스러울 것도 없지만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배경으로서의 역할을 아주 충실하게 해내고 있다. 주인공은 어디까지는 벚꽃인 것이다.

 

화개천 벚꽃은 이런 지리산을 향해 비죽비죽 고개를 쳐들기도 하고 화개천을 향해 꽃 가지를 축축 늘어뜨리기도 하면서,

 
벚꽃과 야생차밭
 
 

화개천 일대를 화려하게 뒤덮는다. 이런 무난하면서도 안정감 있는 배경에 화사한 벚꽃들이 뭉텅뭉텅 줄지어 피어 있어 화개천의 풍경은사람들의 마음을 여지없이 녹여 버리는 것이다.
벚꽃은 단연 봄꽃의 여왕이라 할 수 있다. 벚꽃은 꽃송이 하나하나도 화려하지만 그 꽃송이들이 다발로 무리 지어 피기 때문에 그 화사함은 다른 어떤 꽃도 벚꽃을 따르지 못한다.

 

얇고 여린 연분홍 꽃잎은 살짝 건드려 보기도 미안할 정도로 맑고 청순하다. 그러나 그 꽃잎 가운데 금빛 꽃술은 화사하고 대담해서, 심지어 충동적이거나 유혹적이기까지 하다. 벚꽃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치명적 결말을 예감하면서 뿌리칠 수 없는 매혹적인 여인, 팜므 파탈의 이미지가 떠오르기도 하는 것이다.


쌍계천을 따라 이어지는 이 길은 꼭 걸어가야 할 길이다. 이 길을 걸으면 벚꽃 흐드러진 분홍 화개천이 그대로 마음 속으로 흘러 들어, 마음 속까지 연분홍빛의 화사함으로 물들게 되는 것이다.
이 화사한 봄빛을 마음에 담고 발길은 쌍계사로 이어진다. 이야기가 쌍계사로 넘어가기 전에 미리 말해 둘 것이 있다. 쌍계사를 보고 다시 걸어 내려올 때는 화개천 건너편 길을 걷도록. 화개천 건너편에서 바라보는 벚꽃의 경관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절경이기 때문이다.

 
     
  쌍계사  
     
 

하동의 쌍계사는 절 양쪽으로 계곡이 흐른다 하여 쌍계(雙溪)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물길은 계곡이라기보다는 개울에 가까운 정도로 작아, 그 이름이 좀 무색하기는 하다. 하지만 쌍계사로 들어가는 길이나 경내는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여 바람만 조금 불어준다면 한여름에도 시원하기 그지없는 맑고 청아한 분위기의 절이다. 쌍계사라는 이름만 떠올려도 물소리와 새소리 그리고 바람소리가 들려올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절은 터를 크게 잡은 편은 아니지만 절집들의 크기나 배치가 또렷하고 잘 정제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잘 짜여진 아늑한 사찰이다.

 

 
 
금당 가는길
 

그러나 이 쌍계사의 창건에는 좀 으시시한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신라 성덕왕 21년(722년), 삼법화상이라는 승려가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오는 길에 육조 혜능의 두개골(頂相)을 가져다가 이곳에 묻고 옥천사라는 절을 세웠다고 한다.

 

이미 열반에 든 중국 불교의 대선사인 혜능의 두개골을 가져다 묻다니… 삼법이 이런 천벌을 받을 짓을 저지르게 된 것은, 중국에서 꿈을 통해 계시를 받았기 때문이라 한다. 꿈 속에서 ‘육조 혜능의 정상(頂相, 두개골)을 모셔다가 삼신산(三神山) 눈 쌓인 계곡 위 꽃 피는 곳에 봉안하라’는 계시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삼법은 육조 혜능의 두개골을 가지고 귀국하여 삼신산을 두루 돌아다니게 된다. 삼신산(三神山)은 원래 선인(仙人)들이 산다는 중국의전설 속의 산으로 봉래산, 방장산, 영주산을 일컫는 말로, 이에 빗대어 우리나라에서도 금강산, 지리산, 한라산을 삼신산이라 부른다. 삼법화상이 이 세 산을 돌아다니며 혜능의 두개골을 봉안할 자리를 찾았는데, 삼법화상이 지리산에 이르자 호랑이가 나타나 길을 안내하여 지금의 쌍계사에 혜능의 두개골을 묻고 옥천사라는 절을 창건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사실 이 말은 믿기 어렵다. 우선 육조 혜능이 어떤 사람인지를 잠깐 살펴보자. 혜능에 대해 말하려면 아직도 현대 불교의 큰 줄기인 선종을 빼놓을 수 없다. 선종은, 520년경 인도의 승려 달마가 갈대 잎을 타고 중국으로 들어가 처음 전파했다고 한다. 그래서 달마를 선종의 초조(初組)라 부르는 것이다.

 

달마의 뒤를 이어 선종의 수장 역할을 해온 선사들을 이조, 삼조… 이런 식으로 부르는데, 여섯 번째 수장이 바로 육조 혜능이다. 이 혜능에 이르러서야 비로서 중국 선불교가 뿌리를 내리고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이 중국 선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선종으로 자리를 잡았으니, 육조 혜능은 현대 동북아 불교의 아버지쯤 되는 사람인 것이다. 이런 사람의 두개골을 가져왔다니… 그리고 혜능의 시신은 불교의 관습에 따라 다비식을 치렀을 가능성이 높아 시신 자체가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마 당시에 중국에서 선종이 막 유입되던 시기였으니, 삼법이 혜능의 두개골은 아니더라도 선종과 관련된 어떤 것을 가지고 와서 묻었을 가능성은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삼법이 혜능의 두개골을 묻었다는 자리가 쌍계사에서 금당(金堂)이라 불리는, 육조정상탑전(六祖頂相塔殿)이 있는 곳이다.

 

육조(六祖)란 혜능을, 정상(頂相)은 두개골을 이르는 말이니, 육조정상탑전은 육조 혜능의 두개골이 있는 탑의 건물이란 뜻이다. 실제로 그 자리에는 작은 7층 석탑이 서 있고, 석탑을 덮는 기와집이 있다.

 

하지만 이 탑은 1800년대에 목압사라는 절에 있던 탑을 이 자리로 옮겨놓은 것이라 하니 혜능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탑이며, 탑의 형태도 눈길을 끌 만한 요소가 없다.

 

 

 
쌍계사 천왕문 앞
 
 

이런 탑에 떡 하니 보호각을 하나 세워 건물 안에 탑이 들어앉은 꼴이 되어 보기에는 좀 이상하기도 하다. 건물은 옹색한 편인데, 건물 전면에 걸려 있는 현판은 조선의 명필 추사 김정희의 글씨라한다.


그러나 쌍계사가 본격적으로 가람의 형태를 갖춘 것은 그 뒤의 일이다. 삼법화상이 옥천사를 세우고 약 120년 뒤인 신라 문성왕 2년(840년)에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온 진감선사(眞鑑禪師)가 이곳 옥천사로 와서 절을 크게 일으킨다.

 
     
  진감선사  
     
 

쌍계사에 다녀온 사람들이 가장 잘 기억하는 것은 바로 쌍계석문(雙溪石門)이다. 최치원이 지팡이로 각각 ‘쌍계(雙溪)’와 ‘석문(石門)’이라 새겼다고 전해지는 두 개의 바윗돌이다. 이 두 개의 바윗돌은 쌍계사로 들어가는 초입의 양쪽에 버티고 서 있어 눈에 잘 띄기도 하고, 또 놓치지 않고 보아야 할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쌍계사에서는 그보다는 진감선사의 흔적을 찾아보아야 한다.

 

 
 
쌍계석문
 

진감선사(眞鑑國師 : 774∼850)는 통일신라 말기의 선승(禪僧)으로, 법명은 혜소(慧昭)이고 속성(俗姓)은 최 씨로 알려져 있다. 진감(眞鑑)은 선사가 입적한 뒤 헌강왕이 내린 시호이다.

 

진감선사는 당나라에 유학하여 신감대사(神鑑大師)에게서 선종을 배웠다. 신감은 도일의 제자이고 도일은 혜능의 문하이니, 진감선사 역시 혜능의 선 사상을 그 뿌리로 삼는 선승(禪僧)이라 할 수 있다.


진감선사가 귀국할 당시 신라 흥덕왕의 환대를 받았다고 하니, 귀국 전부터 그 이름을 떨치던 승려였음을 알 수 있다.

 
 

진감은 상주에 잠시 머물다가 이곳 옥천사로 와서 혜능의 남종선(혜능의 선을 남종선이라 부름) 확산에 힘을 쏟았다. 이때에 이르러 쌍계사도 현재의 가람으로 자리잡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때 절의 이름도 쌍계사로 바뀌었다.
이 진감선사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범패(梵唄)라 불리는 불교음악이다.

이 범패를 신라 땅에 정착시킨 사람이 바로 진감선사이다.

 

 범패란 전통 불교 음악으로 음의 높낮이인 가락이보다는 음의 길이인 장단이 주가 되는 노래이다. 스님들이 불경을 읽는 독경 소리도 일종의 가벼운 범패 소리라 할 수 있다. 가사도 가락도 장단도 지극히 단조롭지만, 가라앉는 듯한 묵직한 발성과 깊은 울림 그리고 긴 여운으로 장중하고 유려한 느낌을 주는 음악이다. 요즘은 쉽게 듣기 힘들지만 그래도 들어보면 누구나 아~ 하고 무릎을 칠, 그런 소리이다. 보통 절에서 재를 올릴 때 사용하는데, 동네의 작은 절에서는 아직도 일삼아 범패를 틀어놓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 생활 속에서도 범패 소리의 영향을 찾을 수도 있다. 동네를 돌아다니며 외치는 소리들이 바로 그 흔적이다. 찹쌀~ 떠억~~ 메밀~ 무욱~~ 이 소리를 멋진 베이스나 바리톤의 목소리로 음의 고저를 좀 빼고 깊은 울림과 여운을 더해주면 장단이 아주 긴 범패 소리와 비슷하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우리 동네에는 정말 범패 소리와 흡사한 소리를 내는 분이 계셨다. 다름아닌 세탁소 아저씨였다. 아침 아홉 시경이면 어김없이 범패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다.

 

맹~덩~~ 시~탁~~, 맹~덩~~ 시~탁~~ 아! 안타깝게도 발성은 참으로 좋은데 발음에는 문제가 있다. 그 집의 상호는 명동세탁이다. 이런 소리를 범패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전문가가 이 글을 읽으면 경을 칠 놈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범패는 마음이 산란할 때 한적한 곳에서 그 소리를 듣노라면 다시 평정심을 되찾게 해주는 묘한 매력을 지닌 음악이다. 가끔 예술의 전당 같은 큰 공연장에서 범패 공연을 하는데, 이보다는 산 속에서 듣는 범패가 역시 제격이다.

 

시원한 계곡물 졸졸 흐르는 평상에 앉아 소주 한 잔 걸치면서 범패 소리를 듣노라면 세상 시름이 다 사라지고 마음이 차분해진다. 조금 불경스럽긴 하지만, 불가에서도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요 또 제법일여(諸法一如)라 하지 않았던가.


 

 
팔영루와 구층석탑
 
 

어쨌거나 우리나라에 범패를 토착화시킨 사람이 진감국사로, 쌍계사 팔영루가 바로 그 진원지이다.진감선사는 이곳에서 많은 범패를 작곡했고 또 많은 범패의 명인들을 배출했다고 한다. 그러니 이 쌍계사는 우리나라 불교 음악의 시원이라 할 수 있는 곳이다.


쌍계사 대웅전 앞에는 커다란 검은 비석 하나가 서 있다. 이 비석이 바로 진감선사 대공탑비(鎭鑑禪師 大空塔碑)로 진감선사의 행장이 잘 기록되어 있는 비석이다. 진감선사가 입적하고 37년 뒤인 진성여왕 1년(887년)에 전성여왕이 세운 비석이라 한다. 왕의 명으로 세운 비석답게 당대의 대문장가인 최치원이 직접 비문을 썼다고 한다. 비문 중에 이런 내용이 있다고 한다.


“그는 범패를 매우 잘하여 금옥 같은 소리가 구슬프게 퍼져 나가면 상쾌하기도 하고 애절하기도 하여 능히 제천(諸天)을 기쁘게 할 만하였다.”
진감선사가 얼마나 범패를 잘 했는지를 묘사하는 대목이다.

 

 
 
진감선사대공탑비
 

또 진감선사는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차의 종자를 들여와 심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 차 전래설에는 다른 의견도 있다.

 

진감선사 이전에 김대렴이라는 사람이 차를 들여와 지리산에서 재배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김대렴이나 진감선사나 동시대의 인물이니, 이 무렵부터 쌍계사 일대에서 차의 재배가 시작된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아직도 쌍계사 부근은 야생차의 생산지로 명성을 얻고 있다. 제주나 보성이 차의 생산량은 많지만, 차의 질은 이곳 지리산 야생차를 더 쳐준다고 한다.

 
  아직도 쌍계사 주변에는 야생차를 재배하는 직접 차를 만드는 작은 다원들이 산재해 있다.
그리고 우라나라 차 문화의 중시조라 칭송되는 해남 땅의 초의선사도 멀리 이곳 칠불암까지 와서 ‘다신전(茶神傳)’이라는 책을 썼다고 하니, 이곳 하동이 우리 차 문화의 고향임은 부동의 사실이다. 화개 땅에 벚꽃을 보러 갈 때면 재첩국만 먹지 말고, 우리 차 문화의 종손쯤 되는 화개차 한 잔 정도는 마실 일이다.

화개천 벚꽃을 끝으로 초봄 섬진강 여행은 끝을 맺는다. 그러나 섬진강 주변에 볼거리가 어디 이곳들 뿐이고 또 역사의 흔적이나 절절한 사연이 이 정도뿐이겠는가. 아마도 그 긴 섬진강보다도 더 긴 이야기가 줄줄이 풀려 나올 것이다. 하지만 갈 길도 바쁘다. 이제 섬진강을 뒤로 하고 또 다른 봄의 절정을 찾아 떠나보기로 한다.
 
     
 

< 도로 안내 >

쌍계사로 가려면 일단 남원과 구례를 거쳐야 한다. 남원까지 가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전주까지 간 뒤 전주에서 임실을 거쳐 남원으로 가는 방법이 있고, 아니면 대전 통영간고속도로를 타고 함양분기점까지 간 뒤 88올림픽고속도로를 타고 남원까지 가면 된다.

 

남원에서 구례까지는 19번 국도를 이용하면 된다. 19번 국도를 타고 구례교차로까지 간 뒤 구례교차로에서 우측으로 내려가 바로 좌회전하여 계속 19번 국도를 타면 된다. 이 길을 가다가 화개삼거리에서 좌회전해 들어가면 이 길이 벚꽃길이다. 화개장터에서 약 4~5km 정도 들어가면 쌍계사가 있다. 서울에서 약 4시간 30분 정도 거리이다.


주말에 사람들이 많이 몰리게 되면 이 길은 심한 정체를 빚는다. 이럴 때는 화개천 건너편 길을 이용해 쌍계사로 가는 것이 좋다.

- 대중교통

일단 기차나 시외버스를 이용해 하동까지 가야 한다. 하동에서 쌍계사로 가는 버스를 타면 된다. 서울남부터미널에서 버스를 타는 경우는 바로 화개에서 내릴 수도 있다.

 
     
  <음식점>  
     
  하동읍내에 재첩국을 비롯한 재첩 음식으로 유명한 여여식당(055-884-0080)과 동흥식당(055-884-2257)이 있고 화개장터 건너편의 동백식당(055-883-2439)은 참게탕과 은어회로 유명하다.
또 구례 화엄사 앞으로 가면 한정식으로 유명한 백화회관(061-782-4033/782-0600)과 그 옛날 산채식당(061-782-4439)이 있다.
 
     
   
 
그옛날산채식당 산채백반
동흥식당 재첩국정식
 
     
  <숙박시설>  
     
 

일단 쌍계사 앞에 있는 쌍계별장과 청운산장을 권한다. 청운산장은 음식점을 겸하는 집이다. 그러나 두 집을 이용하려면 미리 예약하는 것이 필수이다.
쌍계별장 : (055)883-1665
청운산장 : (055)883-1666


이외에는 쌍계사 앞에서 칠불사 쪽으로 화개천을 따라 더 들어가면 민박들이 있고, 화개장터 부근에 모텔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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