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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봄여행 - 부여로 떠나는 봄 여행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1.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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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0
조회수
2196
내용


 

예전에 종영되었지만 TV 드라마였던 ‘서동요’의 주 촬영지는 부여였다. 그 사극의 시대적 배경이 백제였으니 그야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예전에는 야외 세트장에서 촬영이 끝나면 철거를 하였지만 요즘은 세트장이 하나의 관광 상품이 되어 각 지방마다 드라마 촬영지로 선택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고 들었다.

 

야외 세트장의 시초가 사극 ‘태조 왕건’을 촬영하였던 문경새재 오픈 세트장으로 기억한다. 주객이 전도되었다고 해야할까. 여행지가 우선이 아니라 그곳에 야외 세트장이 있어 그곳으로 여행을 한다는….
어찌 되었건, 그 후로 전국에 야외 세트장이 들어섰고 그것이 하나의 새로운 관광 상품이 되었다. 이번 여행지, 부여도 마찬가지가 되었다. 야외 세트장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관광객을 유치하는데 얼마나 큰 요소가 되었는지 그저 놀랄 따름이다.

 
     
  백제의 마지막 왕궁터, 부소산성  
     
 

부여 금강변 언덕에 자리한 부소산성(옛 사비성)은 백제의 멸망을 맞은 마지막 왕궁터이다. 백제가 고구려의 힘에 밀려 점차 남하하였고 현재의 공주(웅진)에서 부여로 도읍지를 옮긴 후 100년이 지난 후 백제는 멸망하였다. 그런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백마강은 오늘도 유유히 흐르고 있다. 부소산성의 출발점인 사비문을 지나 산성의 맨 꼭대기까지 울창한 소나무 숲이 이어져 걷기에도 무척 운치 있는 곳이다. 어떤 산성처럼 산을 올라

 

 
 
백마강에서 본 부소산성
 

야 하는 그런 수고는 접어두어도 된다. 사비문을 지나면서 차례로 궁궐터와 삼충사, 영일루, 군창지 등 연이어 볼거리가 있기 때문에 전혀 지루함도 없고 완만한 경사가 걷기에는 안성맞춤이다. 이중 삼충사는 백제의 마지막 충신이었던 성충, 흥수 그리고 계백장군 등 세 사람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부소산성의 맨 꼭대기에는 깎아지른 절벽 위에 우뚝 솟은 낙화암이다.

 

백제가 멸망할 때 의자왕과 삼천궁녀가 백마강으로 몸을 던졌다는 바로 그 바위. 그 당시 백제의 인구나 생산능력으로 볼 때 과연 삼천 명의 궁녀가 있었을까 의심스러울 뿐이다.

 
 

낙화암을 내려와 오른쪽으로 몇 개의 계단을 내려서면 고란초와 고란약수로 유명한 고란사이다. 고란초는 고사리과의 식물로 바위에 붙어 있는 이끼와 비슷해 보인다. 이곳에서만 서식을 한다고 하여 유명하지만 실제 우리나라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법당 뒤로 돌아가면 바위 동굴이 있는데 그곳에서 솟아나는 약수가 바로 고란약수이다. 물맛이 특별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고란초를 약수에 띄워 마시면 삼년씩 젊어진다는 전설이 전해올 뿐이다.

 
 

고란사의 규모는 무척 작다. 하지만 백제의 궁이었던 부소산성 안에 있던 사찰이었다. 이 고란사는 백제 때 창건되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또 고려 때 창건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창건시기는 정확하지 않다.


부소산성과 낙화암을 잘 보려면 유람선을 타볼 일이다. 고란사를 내려가 선착장에서 출발하는 유람선을 타면 낙화암과 조룡대 등 선장님의 자세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백제가 멸망할 당시 당나라의 장수 소정방이 조룡대라는 바위 위에서 백마를 미끼로 백제를 지키는 용을 낚았다는 전설로 백마강과 조룡대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요즘 말로 뻥이 심해도 너무 심한 이야기다.

 
낙화암과 백화정
 
   
  목탑에서 석탑으로 ‘정림사지오층석탑’  
   
 

정림사지(定林寺址)는 정림사라는 사찰이 있던 자리로 부여 시내에 있는 폐사지이다. 안타깝게도 옛문헌이 없기 때문에 단지 이곳에 정림사라는 사찰이 있었다고 추정될 뿐이다. 정림사지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정림사지 오층석탑이다. 목탑에서 석탑으로 발전되는 과도기에 세워졌던 탑으로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목탑은 말 그대로 나무를 깎아서 탑을 만들었기 때문에 디자인(형태) 면에서 조금은 다양한 표현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탑신과 탑신 사이에 있는 옥계석의 끝을 고무신 코처럼 살짝 들어 올린다던지 그런 표현이 가능했지만 석탑을 목탑처럼 만들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정림사지오층석탑
 

하지만 정림사지오층석탑은 목탑에서 석탑

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탑으로 그나마 목탑의 형태를 많이 변형하지 않았다.

 

정림사지오층석탑은 과거에 평제탑(平濟塔)이라 잘못 알려져 왔다. 그 뜻은 백제를 평정했다는 의미인데 탑신에 소정방이 자신이 백제를 침탈하였다는 글귀를 새겨 놓음으로써 소정방이 이 탑을 세운 것처럼 잘못 알려졌던 것이다.

 

백마강과 조룡대라는 이름도 불쾌한데, 게다가 정림사지오층석탑에까지 낙서를 하는 꼴이라니….


 

정림사지오층석탑 뒤로는 석불좌상이 모셔진 건물이 있다. 석불좌상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심하게 마모되어 있어 아예 머리 부분은 새로 만들어 올려 놓았다.
 
     
  한국의 목탑  
     
 

흔히 말하기를 우리나라를 석탑의 나라로 부르고 중국을 전탑의 나라, 일본을 목탑의 나라라 부른다. 이 말대로 전국 어디서나 볼 수 있듯이 우리나라는 온통 석탑뿐이다. 벽돌로 쌓은 전탑과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은 모전석탑이 몇 기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탑이 석탑이며, 또 돌을 이용해 탑을 만들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경지에까지 도달했던 민족임에 틀림없다.


우리나라도 삼국시대에는 나무로 탑을 쌓는 목탑이 유행했었다. 그러나 수많은 전란을 겪으며 목탑은 모두 불에 타서 흔적도 남지 않았고 경주의 황룡사 구층탑 같은 놀라운 목탑이 있었다는 사실만 전해오고 있다. 그렇다고 목탑의 흔적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 목탑의 양식을 그대로 계승한 목조 건물들이 있기 때문이다.

 

 
 

보은 법주사의 팔상전이나 화순 쌍봉사의 대웅전 그리고 최근에 건립한 진천 보탑사의 대웅전 등이 바로 그런 건물들로, 이 건물들을 보고 과거의 목탑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목탑은 그 재료가 가공하기 쉬운 나무이기 때문에 그 규모의 확대도 용이했을 것이고 또 조형적인 요소가 많이 섞여 있었음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예를 들어 목탑은 석탑보다 훨씬 규모가 컸을 테고 또 탑신 위에 얹는 옥개석의 형태도 마음대로 가공이 용이했던 것이다.

 

그러나 화재에 취약한 것은 어쩔 수 없는 목탑의 결정적인 약점이었다. 이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백제에서 처음으로 석탑을 만들었다.

 
쌍봉사
 
 

 바로 익산 미륵사지에 있는 미륵사지탑이 그것이다. 

 

 
  목탑에서 석탑으로  
     
 

미륵사지탑은 우리 역사의 등장한 최초의 석탑으로 알려져 있다. 목탑만을 만들던 사람들이 석탑을 만들었으니 당연히 처음에는 재료만 나무에서 돌로 바뀌었을 뿐이고 형태는 목탑의 형태를 그대로 계승해서 만들었음은 당연하다. 현재 복원공사가 한창 진행중인 미륵사지탑을 보면 석탑인 돌집인지 구분이 쉽게 가지 않을 정도의 형태이다.

 

그러나 돌을 다루는 일은 나무를 다루는 일보다 훨씬 어려운 작업으로, 목탑 형태의 석탑을 만들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해서 석탑 형태의 변형이 시작된다. 과거의 목탑보다는 훨씬 간결한 형태의 탑이 필요했던 것이다.

 

 
 
감은사지 삼층석탑
 

이런 변형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이 바로 정림사지탑이다. 미륵사지탑보다 훨씬 규모도 작고 간소화되어 있는 형태이다. 그러나 옥개석의 끝부분이 가볍게 상승하고 있는 모습은 어김없는 목탑의 형태를 간직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해서 정림사지탑은 우리나라 탑이 목탑에서 석탑으로 옮겨가는 과도기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탑으로 학계에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석탑을 만들었던 백제는 이 정림사지탑을 마지막으로 멸망하고 만다. 백제가 멸망한 후 신라가 이 백제의 석탑을 계승하게 된다.

 

그러나 삼국을 통일한 통일신라는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백제의 흔적을 씻기 위해서라도 백제와는 다른 석탑을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만들어진통일신라 초기 석탑의 형태가 바로 경주 감은사지 삼층석탑이다. 규모가 큰 것은 통일신라의 힘을 과시하기 위함이었을 테고 삼층 탑신에 균형감과 비례감을 갖춘 것은 신라 장인의 솜씨였다. 그러나 감은사지탑도 높이가 무려 13m가 넘는 거대한 탑이었다.

 

이런 규모로는 탑 하나 만들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탑의 규모가 축소되고 대신 탑의 간결한 균형감에 더 비중을 둔 탑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그런 형태로 완성된 탑이 바로 불국사의 석가탑인 것이다. 탑의 높이는 삼층, 위압감보다는 간결함과 빼어난 탑신의 황금비례를 자랑하는 우리나라 고유의 석탑 형태가 완성된 것이다. 현재 제작되고 있는 석탑도 이 석가탑의 형태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을 보면 통일신라시대에 완성된 석탑의 형태가 얼마나 완성도 높은 형태였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무왕을 잉태한 연못, 궁남지  
     
 

궁남지(宮南池)는 백제의 궁, 즉 부소산성의 남쪽에 있는 연못이다. 부소산성은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이 폐망을 맞았던 곳이라면 궁남지는 의자왕의 아버지 무왕이 태어난 곳이다. 무왕은 태어나 왕자가 되지 못하고 서동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갔다. 어린 시절 그는 마를 캐다 팔았고 훗날에는 왕의 밀명을 받고 신라에 정탐병으로 침입하게 된다. 그곳에서 신라 증평왕의 딸이었던 선화공주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급기야 동네 아이들에게 서동요를 부르게 하여 궁궐 안에까지 이 노래가 흘러들어가게 한다. ‘선화공주는 밤마다 몰래 서동의 방으로 찾아간다네…’ 온 대궐 안에 소문이 자자해지자 결국 증평왕은 선화공주를 귀향보내고 기다리고 있던 서동은 선화공주를 백제로 데리고 온다. 그 후 서동은 무왕이 되었고 선화공주는 무왕의 왕비가 되었다.

그 시절 기록이 없으니 이런 내용이 드라마 서동요에서도 비쳐졌다. 그런 배경인 궁남지는 꽃피는 봄이면 야생화들이 피어 나들이 장소로도 손색이 없다.

 

 
 

약 3만여 평에 이르는 이 연못은, 현재는 작은 궁남지만 복원해 놓았다. 원래 이름은 궁남지가 아니었을 텐데 기록이 없기 때문에 학자들이 이곳을 발굴할 때 그냥 궁의 남쪽에 있다는 뜻으로 붙인 이름일 것이다.


현재 궁남지의 규모는 크지 않지만 연못 한 가운데에는 포룡정이 있고 연못 주변에는 빙둘러 버드나무들이 흐느적거리고 있다. 궁남지를 돌아보는 데는 시간이 많이 소요되지 않지만 부여

여행을 할 때 꼭 한번은 들러볼 만한 곳이다.

부여는 도심권에서 당일 여행을 다녀와도 좋을 거리에 있다. 아침 일찍 출발하면 언급한 곳들을 모두 돌아볼 수 있고 조금 더 부지런을 떨면 서동요 세트장까지 볼 수 있다.

 
궁남지 생태탐방로
 
     
 

< 도로 안내 >

서울을 출발하여 부여로 갈 때에는 천안-논산간 고속도로를 이용하는 것이 가장 편리하다. 서논산나들목을 나가면 바로 4번 국도를 만나게 된다. 여기서 우회전하여 4번 국도를 타고 달리면 부여로 들어가게 된다. 부여시의 초입인 동문로타리에서도 4번 국도인 좌측 길을 택해 부여 시내로 들어가면 길 오른쪽에 부소산성의 주차장이다.


정림사지는 부소산성에서 무척 가까이에 있으며 찾아가기는 어렵지 않다. 그리고 궁남지는 부여군청 방면으로 가면 계백장군동산이 있는 로터리가 나온다. 로터리를 돌아 부여군청을 지나자마자 좌회전하면 궁남지 주차장이다.

 
     
  <음식점>  
     
 
구드래돌쌈밥
 

부소산성 입구 반대편으로 가면 구드래조각공원이다. 이 공원 안에 쌈밥정식을 하는 음식점들이 여럿 있는데 비용도 저렴하고 맛도 좋은 편이다.

 

돌쌈밥을 주문하면 돌솥밥과 여러가지 쌈 야채 그리고 한상 가득 밑반찬들이 나와 저렴한 가격에 푸짐한 밥상을 받는 느낌이다.

구드래돌쌈밥 : 041-836-9259

 
 

 

 
  <숙박시설>  
     
  부여의 숙박시설은 대부분 시내에 모여있어 그곳을 이용해야 한다. 아니면 부여에서 가까운 무창포나 대천으로 아예 장소를 이동하는 것도 좋겠다. 무창포나 대천이라면 콘도 시설과 찜질방 그리고 펜션 등 다양한 숙박시설을 이용할 수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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